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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와 헌법의 수호자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올바른 답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학 교수였던 칼 슈미트가 던진 질문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안팎으로 엄습해오는 헌법적 위기 앞에서 그는 물었다.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

당대 최고의 헌법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한스 켈젠이 그 ‘떡밥’을 물었다. 칼 슈미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헌정체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협이 다가올 때, 그것을 지켜내야 할 최종적인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헌법의 수호자’라는 시적인 단어는 대단히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스 켈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떡밥을 있는 그대로 물지 않고, 대체 헌법의 수호자라는 게 뭐냐, 의회가 법을 만드는 것, 헌법재판소가 위헌법률을 심판하는 것, 행정부가 행정 작용을 통해 국민의 권익을 실현하는 것 등이 모두 헌법 수호활동이다, 라는 식의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논쟁은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나버렸다. 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야말로 헌법의 수호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루소의 정치 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고, 국민의 ‘일반 의지’를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자만이 헌법의 수호자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기껏해야 각 지역에서 당선된, 혹은 정당대표로 올라온 국회의원 개개인은 헌법의 수호자가 될 수 없다. 의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의회의 견해는 분열되어있고, 당파적인 갈등으로 얼룩져 있지 않은가. 헌법적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과연 인민 전체의 ‘일반 의지’를 대변할 수 있을까? 의회는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칼 슈미트는 고개를 저었고, 그것은 독일 국민들의 일반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결국 독일인들은 그들의 ‘일반 의지’의 대변자로, ‘헌법의 수호자’로, 히틀러 총통을 옹립한다.

‘헌법의 수호자 논쟁’의 전후 과정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손쉽게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문제가 도출된다. 대체 그 ‘국민의 뜻’이라는 게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일반 의지’를 과연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계속 읽기)



10월 31일 미디어스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급하게 써서 논의 전개가 엄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이유로 사법부가 정치적 판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 손을 떼고, 그로 인해 더 큰 맥락에서 '정치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적어도 정치적 개입을 피할 수는 없는데, 그 순간마다 판단의 기준이 모호하다면 그게 제일 곤란한 일입니다. '대표성의 원리'만을 강조하는 것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읽어주신 분들의 소감과 지적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by 노정태 | 2009/11/04 09:40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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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굽시니스트 at 2009/11/04 10:00
그렇기 때문에 대표성을 4년에 한번씩 재고하는 것 아닐까요.

-이 원칙만 충분히 지켜지면 나머지는 유권자의 의식에 달려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11/04 10:39
주기적인 선거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대표성의 원리'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선거 기간 외에는 그 대표자들이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지 않습니까. 결국 투표를 통한 정치적 의사 반영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현실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실제로 의미 있는 정치적 논의는 어렵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at 2009/11/04 12:5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11/04 13:15
앗, 이런 실수를.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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