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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의 '불온'한 예수
예수전 - 8점
김규항 지음/돌베개


이 서평을 쓰기에 앞서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나는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며,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김규항의 신작 『예수전』에 대해 몇 가지 상식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내가 말하는 신학적 사항들에서 오류가 있다면 누구라도 주저없이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예수전』은 입문서이지만 그리 좋은 입문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네 개의 복음서 중 마르코복음을 강독하는 방식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책을 선택하는 이유가 "예수의 말과 행적을 담은 네 개의 복음서,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쓰이고 그만큼 첨가도 적"(12쪽)기 때문이라면 그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르코복음이 작성되기 시작한 시점을 아무리 멀리 잡아도 기원후 60년 이상으로는 올라갈 수 없다. 예수의 죽음이 기원후 33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면, 이미 한 세대가 지난 시점에 그의 말과 행적에 대한 기록이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네 복음서는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고, 심지어 때로는 상충되는 인물을 보여주기도 한다. 직접 성경을 '책으로서'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가령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서 말하는 예수의 탄생 설화는 서로 다르다. 반면 마르코복음은 다짜고짜 '복음 시작'이라고 선언하면서 출발할 뿐, 그의 탄생에 대한 신비화를 수행하고 있지 않다. 문제는 김규항이 이런 점들에 대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마르코복음을 일종의 '정전' 혹은 '원전'으로 간주하고, 마태오와 루카에는 '종교적 첨가'가 지나치게 많다는 성경 해석관을 견지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전제가 정당한 것일까? 마르코복음이야말로 예수의 말을 듣기 위한 가장 좋은 경로이며, 그 외의 복음서와 여타 신약성경의 내용은 '종교적 첨가물'일 뿐인가?

그러나 복음서들이 단순한 전기적 바탕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 허물어지게 되었다. 복음서들은 교묘하게 다듬어진 신학적 구성물이며, 어느 하나도 세칭 그 저자들이라고 알려진 사람이 지은 것이 없다. 모든 복음서에는 둘째, 또는 셋째, 또는 넷째, 손을 거친 이야기들이 자료로 사용되었다. 모든 복음서는 바울 서신이 나온 이후 사반세기에서 반세기 동안에 저술되었다.

우리가 원래의 예수 공동체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기를 원한다면, 그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좋은 증인은 바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는 훗날 신약성서가 될 문서들을 가장 먼저 쓴 저자이다. 실제로 신약성서 문서들 중에서 그의 진정 서신들만이 그 저자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다.
20쪽, 게리 윌스, 김창락 옮김,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서울: 돋을새김, 2007)


루카복음과 마태오복음이 마르코를 주요 참고 자료로 삼아 기술되었다고 해서, 마르코복음은 '종교적 문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복음서는 당대에 떠돌던 '모든 구전'을 담아낸 책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 이후 유대교 공동체 등에서는 온갖 형태의 구전 설화들이 오가고 있었다. 루카나 마태오(라고 불리는 무명의 필자)가 기록한 탄생 설화들도 그 중 일부분이다. 이것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어떤 종교적 의도, 혹은 의도까지는 아니어도 배경을 나타내는 표식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종교적인 복음서/ 비종교적인 복음서'를 나누는 것은 타당한 시각이라 보기 어렵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것을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규항은 이 책에서 일관되게 '비종교적인 예수'를 찾고자 노력한다. 그러한 시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다음 구절이다.

알다시피 오늘 대개의 사람들에게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도 유다에서 온 메시아도 아닌 '교리 속에서 온 메시아'다. 그 연원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325년 최초의 기독교인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에 있는 제 별장에 세계의 주요한 주교들을 모아 놓고 회유와 협박으로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 본질'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한다. 당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은 자유로운 편이었는데 대체로 예수가 하느님과 같은 존재라는 의견보다는 예수가 사람보다는 높지만 하느님보다는 낮은 존재라는 견해가 우세한 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처음엔 그런 신학 논쟁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이내 예수가 하느님의 지위를 얻으면 자신의 지위도 함께 격상된다는 점을 간파했다. 교리의 통일을 통해 자신의 통치력을 한껏 강화할 수 있다는 점도.

그런 정치적 의도로 내려진 결정은 더 이상 다른 견해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정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뼈대가 되었다. 그후 오늘까지 거의 모든 지식과 신앙에서 예수는 교리 속의 주인공으로 출발한다.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 어떤 생각을 헀고 어떻게 활동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왜 죽임을 당했는지 따위는 모조리 생략한 채, 그를 단지 교리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한다. 정말 예수는 단지 교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그 고단한 삶을 살았단 말인가? 이성으로든 신앙으로든, 예수를 '갈릴래아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교리 속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예수의 정체성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지표가 된다.(24-25쪽)


문제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의의 깊이와 폭이 이렇게 '정치적 선택'이라는 단어 하나로 결정될 수 있을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김규항이 말한 정치적 의도가 개입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니케아 공의회가 아리우스파, 즉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집단의 견해를 배척한 것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만약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한 위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는 유대교의 한 예언자와 다를 바 없는 누군가가 되어버린다. "사람보다는 높지만 하느님보다는 낮은 존재"는 예언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숭배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되지 않는가? 유대인들은 '예언자'에 대한 사랑만으로 예수를 기억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비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예수가 유대교의 예언자와 마찬가지인 위격을 갖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거의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 정립은 정치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지만, 엄연한 신학 논쟁이며 그 차원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예수가 기독교의 예수가 아닐 수 있을까? 한 자연인으로서 살고 죽었던 예수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그를 거론하는 역사적 기록이 대단히 편중되어 있다는 것은 막대한 당혹감을 불러온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본이 존재하는 고대 문헌이다. 그런데 성경 외의 다른 문헌에서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예수와는 정 반대로 세례자 요한의 경우에는 '요제푸스'를 비롯한 당대의 역사적 문헌에서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에게 세례를 배풀어놓고도 쩔쩔 매는 것으로 묘사되는 '겸허한 스승'일 뿐이지만 말이다.)

이것은 실제 역사 속의 예수라는 청년이 당대의 큰 물의를 일으킨 누군가가 아니었을 가능성,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듣보잡'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예수의 운동은 그의 생전 당시만 해도 변변찮은 촌놈 한 무리의 난동에 가까웠고, 궐기다운 궐기도 해보지 못한 채 진압당했다. 그 부하라는 자들 또한 스승이 죽자 뿔뿔이 흩어지고 심지어는 자신이 우두머리 제자였다는 사실마저도 세 번씩 부인한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건'이 터졌고, 갈릴리 촌놈들은 머리에 후광을 뒤집어쓴 채 사도로 돌변한다. 대체 그게 무슨 일인가? 네 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부활'을 결정적 사건으로 제시한다. 김규항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기독교도들은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다'며 굳세게 예수의 부활을 주장한다."(261쪽) 문제는 기독교가 없었다면 우리가 대체 어떻게 예수에 대해 알고 말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실재하였던 한 사람으로서의 예수'가 진정 의도했던 바를 추구하고자 하는 김규항의 시도는 바로 그 점에서 부질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는 네 복음서중 오직 하나만을 '특별'한 것으로 삼고(부활한 예수가 승천하는 이야기를 담은 마태오복음의 결말을 그는 배격한다. "어쨌거나 이 부분은 '가장 먼저 쓰인, 그래서 예수의 모습을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복음서'라는 「마르코복음」의 특별한 의미와는 무관하며, 따라서 우리가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마르코복음」을 특별히 여기는 이유와도 무관하다."(266쪽, 강조는 인용자)), 그 속에서 '역사 속에 존재했던 예수의 진짜 의도'를 찾아내어, 그것이 김규항 자신이 말하는 '불온'한, 진정한 진보 담론과 합치함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런 작업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니다.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이단 마르키온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및 바울서신만을 남기고 다른 신약성서를 지워버렸다.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복음서에서 스토아 철학자를 발굴하고자 했다. 김규항 자신이 치열하게 비판하는 대형 교회의 목사들도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예수는 베버주의의 가장 속물화된 버전을 몸으로 구현해낸 누군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가 복음서 중 어떤 것은 털어내고 어떤 것에는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여 '나의 예수전'을 쓰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역사 속의 예수'는 내게 유리한 말을 했다, 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게리 윌스의 다른 책을 인용해보자.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성서 밖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성서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 단 한 가지의 이유는 바로 부활에 대한 성서 집필자들의 믿음 때문이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예수'를 확인하기 위해 구문을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은 퇴비 더미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태평양 바닥에서 뉴욕 시를 찾아내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논리가 뒤엉켜 혼재되어 있는 전혀 엉뚱한 담론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예수는 바로 믿음의 예수다. 그러한 믿음을 거부한다면 성서 속의 이야기들을 믿을 이유가 전혀 없다. 성서 속의 예수는 말씀을 전하고 부활했던 바로 그 예수다. 그가 이끈 신비로운 무리의 구성원들이 품고 있던, 그의 영속적인 활동에 대한 믿음이 성서에 대한 기독교적인 믿음의 기반이다. 그것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예수에 대해 왈가왈부 성가시게 할 필요도 없다.
25쪽, 게리 윌스, 권혁 옮김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서울: 돋을새김, 2007)


그런데 앞서 말했다시피, 삼위일체 교리가 없다면 유대교의 전통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는 실패한 듣보잡 '불온'분자일 뿐이며, 유대교 전통에 익숙하다 해도 죽었다가 살아난 예언자 중 하나일 뿐이다. 예수에 대한 네 편의 장대한 전승을 보존해온 집단의 믿음은,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교리에 기반하고 있다. 하필이면 그 한 사람만이 하느님과 동일한 위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기도 했다는 그 억지 논리 말이다. 심지어 그것이 공식 교리가 되는 과정에는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고, 반대파들은 폭력적으로 탄압당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이 실로 예수의 '부활' 그 자체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대체 '부활'이 무엇이었을까? 어떤 제자들은 몸으로 살아난 예수를 만났다. 바오로와 같은 이방인들은 주로 환영이나 환시를 통해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을 것이다. 혹은 성령의 역사함 속에서 예수의 부활을 체험했을 수도 있다. 성삼위가 하나가 아니라면 예수의 부활은 집단 히스테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한다. 2천 년의 역사를 통해 다져진 교리는 그 기간동안 빚어진 신앙의 역사적 증거이자, 동시에 신앙 그 자체이기도 하다.

김규항의 '불온'한 예수상이 갖는 또 다른 문제점은, 과연 그렇게 구성해낸 '역사적 예수'가 실재의 증거와 어느 정도 합치하느냐 하는 것이다. 김규항은 예수가 태어나고 자란 갈릴래아를 오늘날의 팔레스타인과 서슴없이 등치시킨다.

가난과 차별,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절망감 속에서 갈릴래아 사람들의 저항의식은 늘어만 갔다. 끊임없이 소요와 봉기가 일어났고 대개의 갈릴래아 청년들은 과격한 사회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불의한 세상과 맞서 싸우고 또 죽어 갔다. 예수는 바로 그런 참혹한 현실 속에서 성장했다. 예수는 마치 오늘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에 압살당하는 팔레스타인의 소년처럼, 동네 형들과 삼촌들이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다 줄줄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22-23쪽)

예수는 오히려 폭력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갈릴래아에선 크고 작은 봉기가 셀 수 없이 일어났다. 예수는 그런 현장을 외면할 수 있는 특권계급이 아니었다. 예수가 형 혹은 삼촌이라 부르던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 갔고 나중엔 친구와 동생들이 죽어 갔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오늘 이스라엘로부터 압살당하는 팔레스타인 점령 지구의 청년들과 같다.(237쪽)


김규항이 묘사하는 예수는 완벽한 운동권 청년인데, 그것은 다름아니라 예수의 내면에서 이른바 NL과 PD가 완벽하게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점령 지구의 청년들이라면 계급모순보다 민족모순에 먼저 눈을 뜨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계급적 인식이 반드시 그들에게 수반한다고 볼 수는 없단 말이다. 그런데 김규항이 말하는 예수는, 심지어 산업혁명이 일어나지도 않은 시점인데,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층민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랬다는 것만으로도, "예수는 요즘 말로 '계급적 관점'을 가진 셈"(137쪽)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계급적 관점'을 이런 식으로 규정한다면, 김규항 자신이 이 책에서 역시나 신랄하게 비난하는 자들, 바리새인에 비견된다고 말하는 '명망가'들도 계급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가난한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는 것은 예수만의 일도 아니다. 팔복(八福)에 대한 해설을 하며 테리 이글턴은 "예수의 격언은, 부패한 지배계층을 주요 표적으로 삼았던 구약 예언자의 전통을 따른 것"(31쪽, 대한성서공회·김율희 옮김 『예수-가스펠』(서울: 프레시안북, 2008))이라고 설명한다. 김규항이 말하는 계급적 의식은 역사상 훌륭한 '스승'이라면 다들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내가 이렇게 따지고 드는 것도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허한 개념의 놀음'에 지나지 않을테니 여기서 우리는 다시 '팔래스타인 예수'로 돌아가보자. 앞서 인용한 책에서 테리 이글턴은 예수가 그렇게 가혹한 탄압을 어려서 경험해보지 못했으리라는 쪽에 한 표를 던진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의 고향 갈릴리에는 로마군이 공식 주둔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가 원한에 사무친 반제국주의자 부모의 품에서 자랐을 리는 없다. 예수가 어렸을 때 로마 군인들을 봤다면 그건 아마 휴가를 즐기러 나온 군인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죽은 유대에 주둔한 로마군의 규모는 매우 작았다.
11쪽, 서문, 예수 그리스도 지음, 테리 이글턴 서문, 대한성서공회·김율희 옮김 『예수-가스펠』(서울: 프레시안북, 2008)


이 글을 시작하면서 말했듯이 나는 신학을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갈릴리에 로마군이 공식으로 주둔했다는 이글턴의 말이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로마의 대외 지배 방식을 고려해볼 때 이글턴의 설명이 더욱 사실에 부합하는 것 같다. 극소수의 미군이 주둔하는 대한민국에서 극소수만이 원한에 사무친 반제국주의자가 되는 것을 연상해볼 수도 있다. 특히 그 청년이 엄격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해보면(예수의 구약 인용은 자주 틀리기로 유명한 반면, 랍비로 훈련받은 바오로의 인용은 완벽에 가깝다), 본래 민족주의란 그 민족 내에서 많이 배운 자들이 외세에 대해 품는 감정이므로, 그가 팔레스타인 청년의 마음으로 로마와 싸웠을 것 같지는 않다.

가장 '교리'에 따른 가필이 적다는 전제 하에 마르코복음을 선택하고, 그중에서도 어떤 내용은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반면 어떤 내용은 우의적으로 해석하며, 그래서 결국 결연한 민족주의자면서 동시에 계급적 문제의식을 갖추고 있었던 불온분자로 예수를 재탄생시키는 것은 이 시점에서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한국의 교회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점점 가시화되고 있다고 쳤을 때, 과연 이 책에서 제시하는 '불온한 예수'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김규항의 말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우리는 정치적 혁명성이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248쪽) 김규항이 제시한 예수가 얼마나 '불온'한지도 결국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될 것이다. 과연 주류교회는 이 책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금까지는 (훌륭한 판매량과 달리) 그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온다. 혼자만 불온하면 무슨 재민겨...


참고문헌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 10점
게리 윌스 지음, 권혁 옮김/돋을새김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 10점
게리 윌스 지음, 김창락 옮김/돋을새김


예수 : 가스펠 - 10점
예수 그리스도 지음, 테리 이글턴 엮음, 김율희 옮김/프레시안북
by 노정태 | 2009/07/20 03:22 | 트랙백(1) | 핑백(4) | 덧글(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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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김규항의 예수전을 읽고
예수전 - 김규항 지음/돌베개 장님이 먼나라로 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코끼리'라는 동물을 만져볼 기회가 있었다. 돌아와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전했다. '코끼리는 엄청 굵은 기둥과 같은 동물'이라고. 그때부터 동네 사람들은 코끼리는 기둥같은 동물이라 믿어왔다. 나중에 그 동네에 책이 한권 흘러들어왔다. 코끼리에 대한 책인데 오래전에 쓰여졌고, 작자는 있으되 정말 그 사람인지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 책의 내용이 논란이다.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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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써야지. 1. 예수전 - 김규향 이 책은 5월 마지막날에 토플을 보고 나서, ㄱㅇㅊ씨를 만나러 종로 교보에서 기다리던 중에 후딱 다 읽게 되었다. 이 책에 대한 좋은 서평으로는 노정태씨의 글을 들 수 있다. 우선 개인적으로는 예수의 삶에 대한 것들이 나온 것에 대해서 참 감사할 따름인데, 예수는 항상 교회와 신대안에 갇혀있으신지는 몰라도, 그때문에 일반적으로 ... more

Linked at soundlake &raqu.. at 2009/07/30 05:53

... 쓴 책이라고 한다. 두 개의 글이 걸리는데, 하나는 “예수는 없다”는 책에 대한 한 목회자의 칼럼이 있고, 김규항 씨의 “예수전”에 대한 리뷰가 있다. “예수는 없다”를 읽은 지 오래 되어, 느꼈던 감정이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느낌이었다. ‘기독교=크리스트교=예수교&#8 ... more

Commented by 선다형 at 2009/07/20 05:18
잘근잘근 잘 따져 주셨군요. 아, 그리고 주류 교회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려면 교회(나아가 종교 법인 전체)에 대한 세금 문제를 자꾸 거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민/상식적 발상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매우 불온한 발상이지요...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0 13:42
말씀하신 교회에 대한 세금 문제를 거론한다거나, 목사직을 세습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등의 실질적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주류 교회에서는 난리가 나겠죠. 그런데 김규항이 대상으로 삼는 독자들은 실질적 기득권층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불온'은 말하자면 내수용에 가까워요.
Commented by 『한군』 at 2009/07/20 06:07
아무래도 김규항이 "부활"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0 13:53
흠... 부활의 전제조건은 사망인지라, 농담으로 하기에는 다소 과한 표현이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김규항 씨가 더 실천적이고 구체적으로 '불온'해진다면 그야 좋은 일이겠지요.
Commented at 2009/07/20 10:2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0 13:51
저는 마르코복음이 '원전'이라는 평가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작성되었고 공관복음의 뼈대 노릇을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또한 엄연히 '종교적'인 텍스트입니다. 게다가 저자가 '마르코'인 것도 아니고요. 복음서의 실제 저자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저자 마르코는, 이라고 할 때 거명되는 이름은 실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코드 네임'이라고 여겨져야 마땅합니다). 마르코복음은 '원전'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 모든 사실들을 잘못 파악하게 할 우려가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참고문헌에 나온 책들은 다 좋습니다. 다만 이글턴이 서문을 단 책은 그 서문과 각주를 제외하면 공동번역 그대로라는 사실을 감안하실 필요가 있죠. 4복음서를 '책'으로 읽기에는 더 없이 좋은 구성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여울바람 at 2009/07/20 11:54
앗, 그럼에도 별 4개이군요.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0 13:50
내용은 별 3개인데, 만듦새가 좋아서요. 하나 만회했습니다.
Commented by 글쎄요 at 2009/07/20 18:14
김규항님의 예수전은 주류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책이 아닙니다. 혁명의 지혜를 모색하는 책이지요. 책에도 그 점이 어려번 강조되어 있구요. 도대체 읽기나 하신건지....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1 00:13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잘 읽었죠. '혁명의 지혜를 모색'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혁명은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에 의해 확인되는 것이라는 김규항의 말이 참일 때, 그의 예수전이 혁명적인 예수관을 담고 있다는 것은 주류교회의 반발로 확인될 수밖에 없죠. 아마 옹호자들은 '이 철저한 무시야말로 진정한 반발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groove at 2009/07/21 01:17
한국 사회의 주류 기독교에 대한 그 어떤 내용의 책이 나오든, 아마 그네들은 '침묵'과 '무시'로 일관할 겁니다. 심지어 출판보다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는 공중파 방송에서 '조져대도' 꿈쩍도 않는 그들이니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김규항의 이 책이 설령 우리 사회 주류교회에 이렇다할 파장이나 불편함을 가져다주지 않았다고 해도, 그 이유로 이 책의 가치가 폄훼되는 것은 좀 야박한 일이라는 얘기지요.

노정태님이 길게 쓰신 위와 같은 서평은 일종의 '훈고학적 접근'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 저는 그런 접근 방식이 얼마나 유의미한 것인지 의구가 듭니다. 정태 님께서 스스로 인정하셨듯이, 어차피 신학에 관한 전문가가 아닌 이상(김규항 씨나 정태 님이나 둘 다 전문가라 볼 수는 없겠지요) 복음서의 기원이나 신빙성 등을 논하는 것은 조금 허망한 감이 있지요.(물론 그렇다고 전문가만이 떠들 수 있다,는 일종의 엘리트주의를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김규항의 [예수전]의 핵심과 요체는 종교를 믿지 않는 일반 독자들, 혹은 기독교를 믿고 있으나 예수의 일면만을 좇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위대한 혁명가'이기도 했음을, '민중의 벗'이기도 했음을 상기시켜주는 데 있지 않을까요. 그 정도의 '환기 효과'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종교서가 그리 많지 않다는 출판계 현실을 고려하면 그 가치는 더욱 도드라져 보이기도 합니다.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1 16:00
예수가 '위대한 혁명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만, 그 과정에서 예수를 오직 '혁명가'로만 만들어버리는 것은 문제죠. 예수의 이름을 혁명과 함께 운운하는 것은 오직 그 예수가 지금의 예수, 종교적 권위를 가진 예수이기 때문에 의미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김규항의 논법에서 예수는 종교적 위엄을 상실하고 그냥 혁명가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리죠.

그런데 이런 식의 편리한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보수적인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에게는 아무런 인식론적 타격을 주지 못합니다.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혁명가다, 이런 말은 5000원짜리 체 게바라 티셔츠만큼이나 상투적이고 무의미해요. 그들이 '믿는' 예수, 신앙의 대상인 예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기존 교단의 반응이 없는 이유는 굳이 대꾸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겠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Commented at 2009/07/21 11:5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1 16:04
Q문서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태와 누가에 나오는 '말씀'들은 다 종교적 첨가물이거든요. 그런 것들이 등장하지 않는 마가만이 '특별'한 복음서입니다. 김규항의 논리 구조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백 명의 마음속에 백 명의 예수가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기 좋을대로 신을 만들어서 숭배하는 결과를 낳지 않겠습니까? 종교는 '영성'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회적인 것이고요. '영성'을 강조하다보면 결국 개인적인 차원에서 극단적인 자유주의로 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두에게 각자의 예수'같은 논법으로 '영성'을 강조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at 2009/07/21 17:3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2 00:51
리플과 서평만으로 책의 내용을 다 짐작해 내셨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문제는 제가 그 당위에 동의할 수 없다는 데 있죠. 위에서 제 어조가 다소 차가웠는데, 좋은 리플 잘 받았습니다.
Commented by 린드버그 at 2009/07/21 23:59
김규항씨는 정태님 글 본문에서처럼 "정치적 혁명성이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고 했지 정태님이 댓글에서 쓴 것처럼 "혁명은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에 의해 확인되는 것이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가공해 입맛대로 이리저리 발라먹지 마시고 책 자체의 맥락을 생각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전은 혁명을 원하는 사람들이 읽는 책입니다. 애초부터 이 책은 이들에게 꿈을 주기 위해 쓰여진 책이므로 꿈보다 현실이 더 좋은 바리새인들은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어차피 읽는다고 해도 그들에겐 아무런 인식론적 타격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허균이 쓴 홍길동전을 읽고 양반들이나 중인들이 모반을 꿈꾸지 않듯 말입니다.

간디가 물레를 돌린 후에야 사람들은 영제의 자본주의를 비로소 타도가 가능한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에게 '외부'를 알려주는 것이 결코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겁니다. 예수를 다른 방식으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충 책 소개만 읽어봐도 알겠습니다. 정태님은 바리새세요.

ps. 참고로 저는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아니며,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 아니더래도 참고할 혁명가는 많아서요.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2 00:53
1. 그 말이 그 말이죠.

2. 책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이 읽어보고 서평을 쓴 저한테 '맥락을 중시하라'고 하시는 건 어딘가 이상합니다만.

3. '외부'도 선언되는 게 아닙니다. 체제에 의해 증명되는 거죠. 저는 제가 외부에 있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Commented by 린드버그 at 2009/07/22 15:30
책을 읽지 않고 책요약만 읽었어도, 책을 쓴 사람과 서평을 쓴 사람의 성향만 알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입니다만? 그렇다면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교회 비판도 할 수 없게요?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2 16:28
"책 내용 중 일부를 가공해 입맛대로 이리저리 발라먹지 마시고 책 자체의 맥락을 생각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말은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책 전체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것을 읽어본 저이기 때문입니다. 읽지도 않은 예수전을 붙들고 김규항과 함께 혁명의 꿈을 꼭 이루시기 바랍니다.
Commented by 서울비 at 2009/07/23 01:32
노정태님 차근차근 써내려간 느낌의 글 잘 읽었습니다.

몇 가지 드는 생각 중

우선 복음서 중 특별히 종교적/비종교적 텍스트를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사실 어떤 고고학적 작업에 있어서 영양가 없는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은 화석이 부족한 어떤 공룡이 실재했었는지 밝혀내는 게임과는 좀 다릅니다. 그것은 예수의 어떤 비종교적이고 역사적 실체를 제대로 한번 규명해보자는 소망?으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교리에 의거하여 해석돼왔던 예수가 실제로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인간의 삶에 불화와 폭력과 위선을 낳고 있다는 것을 반성하면서 시작된 일종의 정치 운동이지요.

그간 사람들의 욕망과 정치적 의도에 의해서 곡해되었던 정치종교적 껍질이 실제로 부정적인 현상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드러난 부정적 종교현상을 교정하기 위한 반성적 작업도구로 유대인 예수청년을 다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이 재조명된 것은 그것이 증명하기 좋은 팩트(예를 들면 시간 순서상 먼저)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교회기득권의 욕망으로 행해온 정치종교적 해석에 대해 재검토를 요구하기에 가장 좋은 텍스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이러한 '선택'을 가리켜 너 또한 팩트는 아니고 종교적 선택에 불과하니 저것도 종교적이고 이것도 종교적인데 뭐하러 뻘짓하냐?라고 하시면.... 숱한 고전을 사상적 기반으로 간직한 많은 사람들을 적잖이 당황케 하는 발언 같습니다.

아시겠지만, 예수세미나의 학자들 중 초창기와 같은 수준으로 팩트에 아직도 천착하는 현대신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좀 더 솔직하고 어두운 정치적 의도를 배제하며 인류학적 사료를 고려하는 지적성실성은 늘 문제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지적성실성이 아니라 단순히 종교적 믿음에 따른 것으로 보는 어떤 사람들은 단연히 비종교인의 길을 택하지만, 많은 여성신학자를 포함하여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경전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성실한 해부작업을 "글쎄 누가 들어주기나 할까?"라며 폄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김규항이 이 작업에 성공했는가는 저도 의문입니다만.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3 22:18
문제는 어디까지가 '어두운 정치적 의도'인지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겁니다. 흔히 지적하는 마태복음의 '마음이 가난한 자'도 그렇죠. 백이면 백 그 구절이 '오염'된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마태복음의 염결한 도덕주의와 잘 상응하기도 합니다. 저로서는 김규항의 예수전이 기득권에 저항하고 있으니(혹은 저항하노라고 선언하고 있으니) 이 해석은 좋은 해석이다, 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Commented by 타키온 at 2009/07/24 18:56
예수전은 즐겁게 읽었는데요, 김규항의 논리보다는 그의 문장을 워낙 좋아해서...ㅋ

좀 다른 얘깁니다만,
지금까지 예수에 관련된 제 총 결론은, 예수는 비역사적 인물이다...라는 쪽입니다. 예수는 '오시리스 신앙의 유태인 버젼'이라는 증거가 너무 많더군요. 저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구요.


그렇다고 해서 신약성서가 아예 의미가 없는 건 아니라 봅니다.
대승불교 경전도 다 창작이지만 깨달음의 깊이가 담보되는 측면이 있으니까요.

단, 역사적 예수와 그 사회적 의미를 세세한 부분과 연결하여 해석해내는 시도 자체가, 제가 볼 땐...넌센스입니다.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5 21:42
요즘에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칭송할 때 '부자가 될 사람'이라고 하죠. 아마 당시에는 당연히 특출난 누군가를 신화적으로 포장했을 테고, 그 신화의 형식은 여러 이방 종교의 형식을 띄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MBC 성공시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 판에 박힌 '부자 인생 스토리'를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중 누군가가 비역사적 인물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 일이죠. 그야 가치중립적인 탐색이니까요. 문제는 그 예수의 모습을 이미 정해놓은 채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부분이에요.
Commented by 타키온 at 2009/07/25 22:25
혹시 '예수는 신화다' (원제 : The Jesus Mysteries)라는 책을 아시는지요.
결코 어설픈 '설'이 아니라 몹시 탄탄한 논거를 갖추고 있는 책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논리적 반박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꼈습니다.
최근 인터넷에 떠돌던 '시대정신'이란 비디오클립의 첫번째 이야기가
바로 저 책 내용을 근거로 한 겁니다)

2002년에 동아일보사에서 출판했다가 기독교계의 거센 항의로 아예 절판되어 버렸죠. 인터넷상에 워드본이 떠돌아다니구요, 아마존에선 원서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모든 예수의 언행...이미 예전에 다 있던 이야기들입니다.
거의 90퍼센트에 육박하는 싱크로율을 자랑하지요 ^^

그럼 그것이 실존 인물에게서 유래된 것들인가...일부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태양신 신화, 즉, 우주 천체의 움직임을 의인화한 것들이 많고 거기에 이런 저런 살이 붙은거지요. '예수 캐릭터'는 영지주의자들이 이교의 신인(태양신)을 유태인스럽게 해석해서 만든겁니다.


즉, 오시리스 신앙이라는 건 태양신을 믿는다는 것인데, 예수는 그것의 유태버젼이라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라는 이름부터 그렇습니다. 거의 모든 것이 천문학적 관찰을 의인화한 거에요.


물론 신약에서의 예수와 그 주변 인물들을 파보면 유태 사회의 여러 측면을 분석해낼 수 있겠지요. 하지만....예수의 비역사성에 대한 논거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면....예수의 역사성, 혁명성 등을 논하는 글을 접할 때 마다 약간의 허탈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요. 앞 댓글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의미가 없다는 건 당연히 아니구요.


음.. 꿈보다 해몽이랄까. 뭐, 해몽자체가 오히려 더 큰 의미를 갖는 사례가 인류역사에 무수하긴 하지요.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9 16:00
댓글에 남겨주신 내용만으로도 태클을 걸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매우 흔한 이름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천문학적 관찰의 의인화"라고 보는 것은, 대체 무슨 근거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억측일 가능성이 커요. 가령 프로테스탄트쪽에서는 안 보는 외경 중 '집회서'라는 게 있습니다. 그 책의 저자 이름도 '예수'에요(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그럼 그 책도 태양신과 천문학적 관찰과... 의 산물인가요?

예수가 실존인물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기원후 3세기 무렵이었나, 아무튼 대단히 오래 전부터 떠돌던 떡밥입니다. 그에 대한 가장 오래된 반박으로는 교부 이냐시오스가 쓴 '일곱 편지'가 있는데, 제가 그 책을 꼼꼼하게 읽지 않아서 그 내용까지 소개해드리지는 못하겠네요.

예수가 실존인물이었다 아니었다 하는 논쟁을 이 블로그에서 할 생각이 제게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김규항의 책에 대해 제기한 의문은 이미 예수가 실존인물이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요. 따라서 그에 수긍하지 못하실 경우 더 이상의 의미 있는 대화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타키온 at 2009/07/30 02:24
떡밥, 억측 수준으로 말씀하시니 한 마디 안드릴 수 없네요.


예수란 이름이 흔하다는 것, 저도 잘 압니다. 제가 소개드렸던 책에도 잘 설명이 되어 있어요. 하지만 제가 지칭하는 예수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그 '예수'를 말합니다.

집회서의 저자가 예수인데 그 책도 태양신, 천문학적 관찰의 산물이냐고 말씀하신 부분.... 만약 그 책의 내용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캐릭터의 언행을 묘사하고 있다면 저는 '그렇다'고 말하겠습니다.
'홍길동'은 실존인물이 아닌데 누군가 홍길동 캐릭터를 사용하여 '외전'을 써댄다면 그거야 말로 떡밥이 떡밥을 낳는 것이지요.


이냐시오스가 쓴 일곱 편지요? 휴우...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이명박의 정책이 엉망이다...라고 말하니 그렇지 않다며 유인촌이 쓴 책을 근거로 드는 수준이거든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예수 신화론은 그렇게 만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추천드린 책의 일독을 충심으로 권합니다.
처녀수태, 12월 25일 출생, 3인의 동방박사, 30세에 출세, 12사도, 십자가 처형, 부활....가장 기본적인 것만 짚어도 이집트의 태양신 캐릭터와 단 한가지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태양이 1년 동안 하는 운동을 의인화 한 것들입니다. 이런 캐릭터가 예수 이전에 수십명이 넘어요. 예수가 했다 던 진리의 말들, 다 예전에 있었던 말들의 싱크로라니깐요.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이 캐릭터를 빌어 영성운동을 했던 것 뿐입니다.
그들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는 신과 하나되는 것, 불교식으로 보면 부처가 되는 것이었죠. 그러니 이들의 입장에선 예수의 실존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안됩니다. 이건 그냥 깨달음의 교습을 위한 캐릭터니까요.

이들과 흐름을 달리하는 사도 바울 같은 이는 예수의 전설만 들었지 예수는 본 적도 없는 사람이구요.



떡밥, 억측이라.. 예수 캐릭터야말로 떡밥 중 떡밥이구요. '일곱편지'같은 것은 떡밥이 떡밥을 낳으며 억측이 억측을 낳는다...란 말의 현현이라 하겠습니다.
말씀하신 책, 예수의 비역사성에 관련된 너무도 강한 증거들에 대한 당시 교부들의 후달리는 히스테리지요. 이냐시오스 뿐만이 아닙니다. 너무나 허탈한 증거가 많이 나오자 변명하던 교부들 많습니다.


홍길동전을 보며 혁명성을 고취할 수는 있지요.
나름 의미도 있겠지요. (최근에 고미숙이 임꺽정 갖고 계몽스런 책 썼더군요)
그러나...근본적으로 보면 허무하다는 겁니다.
심각하게 폼잡는게 웃길 수 밖에 없거든요
저는 그런 차원에서 말씀드린 거구요. 언젠가 그 책 한 번 보시지요.
생각이 달라지실지도 모릅니다.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30 13:54
가장 기본적인 사실부터 오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4복음서를 통해 행적이 전해진 예수가 타키온님의 말씀대로 영지주의자들의 산물이라면, 대체 왜 그 영지주의자들의 작품인 예수가 종말론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해명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와 바오로는 모두 종말론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12월 25일을 예수의 생일로 정한 거야, 당연히 하지에 맞춘 거죠. 예수의 실제 생일이 언제인지 알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몰일시가 기록되는 귀족이나 왕가의 자제가 아니었으니까요. 예수의 생존 당시 그를 따랐던 사람들도 그런 시시콜콜한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들이 종말론자였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더욱 그렇겠죠. 세상이 곧 멸망할 것인데 생일상 챙겨먹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냔 말입니다.

크리스마스, 부활절, 등등의 '명절'들은 교회에서 적절하게 이교도들의 축제를 흡수하면서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이교도들의 에너지를 무조건 억누를 수만은 없으므로, 그것을 기독교의 맥락으로 흡수하고자 한 거죠. 그게 '예수는 신화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요? 기원후 6~70년까지만 해도 예수를 직접 만나본 사람들이 수도 없이 살아있었고, 그들은 예수에 대한 온갖 전승을 듣고 그 내용에 대해 바로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문맹자들의 기억력을 과소평가하시면 곤란하죠.
Commented by 타키온 at 2009/08/01 09:05
예수 사후 그를 직접 만나본 사람이 수십명...이란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점점 더 확신이 드는군요. 환단고기 읽으셨습니다 ^^

예수신화론에 대한 정보를 더 접해보시길 충심으로 권합니다. 이 분야의 연구자들은 무슨 3류 허접들이 아닙니다. 최고 레벨의 학자들이죠. (추천드린 책 이외에 '예수 퍼즐'이란 얼 도허티의 저서도 있습니다. 번역이 좀 후지긴 하지만..)


'예수'라는 캐릭터 장사가 수천년이 넘다 보니 이건 건드리기 조차 부담스런 떡밥이 되고야 만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떡하겠습니까, 오직 진실만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일텐데요. (말씀하신 '종말론' 조차도 태양의 황도 12궁 변경의 은유입니다. 황소자리, 물고기 자리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러니 종말은 없지요)


감히 말씀드리지만,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한 후, 노정태님 정도의 지성이 있는 분이라면 예수가 실존인물이라는 말은 양심상 하실 수가 없게 될 겁니다. 시뻘건 증거가 압도적으로 튀어나오니까요. 그 증거들을 보고 나면, 예수 신앙의 유효성과는 별개로 예수가 신화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 당연히 합리적이란 생각이 드실겁니다.


이거야말로 오컴의 면돗날이죠.
평생의 행적과 사용한 언설이 거의 90프로에 가깝게 일치하는 캐릭터가 예수 이전에 수십개가 있었다고 한다면...그리고 그 기원은 이집트의 태양신이라고 한다면...모든 행적과 은유가 태양운동의 설명이라면...예수는 권위있는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된 적도 없다고 하면...(기독교 신자들이 주장하는 건 후대의 삽입 조작이거나 순환논증이었던게 다 밝혀졌죠) 대체 어떤 것을 택하는게 합리적일까요.

이건 이교의 문화나 캐릭터가 예수라는 실존 인물에 접합된 것이 아니라 예수 자체가 그냥 캐릭터라는 걸 말합니다.

(수백년 전, 이 사실을 고민하던 교부들은 자기 저서에서 이건 악마가 미리 예수 흉내를 낸 것이다...라고 까지 변명했습니다. 안습이죠 ^^)


6천년 전 쯤에 인류가 창조되었다는 걸 이제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게 맞다면 도대체 공룡 화석을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요.
신께서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공룡뼈를 묻었다...라고 믿는 것 보단 공룡이 있었다고 믿는게 훨씬 낫지요.
예수 캐릭터도...곧 그렇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만큼 인류가 해방되겠지요.

댓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종료하겠습니다.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8/01 14:04
뭐랄까, '지구 온난화 사기극' 같은 통속적인 다큐멘터리를 한 편 보고 열렬한 온난화 회의주의자가 된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당연히 그 책에서는 교부들이 예수 가현설에 대해 제대로 된 대응을 못 했다고 묘사하겠죠. 기독교의 역사와 발전에 대한 선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하나의 이설만을 접하고 그것을 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지적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프리메이슨이 세계를 주무르고 있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인 거죠. 저도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Commented by 미미 at 2009/07/27 10:07
동감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9 16:02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미미 at 2009/07/30 21:40
노정태// 아뇨, 타키온님한테 한 말이에요.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31 01:05
덧글 기능을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Commented by 미미 at 2009/07/31 12:24
넹.
Commented by ㅂㅂ at 2009/07/28 03:57
김규항에 대한 메모를 발견할 때마다 노정태 씨의 편협함을 발견하곤 합니다.

책 발간 후 청중과의 대화에서 김규항 선생은 이렇게 말했죠.

"대개의 이념 논쟁이란 실은 이권 다툼이다. 만약 내가 이 책에서 특정 교회나 특정 목사의 비리, 금전을 문제삼았다면 격렬한 반응이 있었을 것이나, 내가 이 책에 담고자 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벗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것이다."

노정태 씨의 결론과 비슷한 류의 질문이 나왔었거든요.

한국사회에서 지식인들이 소수자로 내몰리고 있다는 기도 안차는 반응도 그렇고...
님은 "김규항"에 대한 반감을 내보이기에 앞서서 도대체 자기의 글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좀 더 공부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9 16:05
과연 그 예수가 '평범한 사람들의 벗'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저는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저 자신도 그렇고, 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정치적 지도자, 혁명 리더를 넘어서는 정신적 스승을 갈구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개화기 이전 민중들에게 미륵신앙이 퍼져나갔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전에서 말하는 '신앙 없는 예수'는 바로 그런 측면을 도외시할 여지가 크죠.
Commented by 모니카 at 2009/07/28 17:49
저는 가톨릭신자이고, 이 책을 읽은 한 사람입니다. 노정태님께서 이 책에서 부정적이라고 느끼신 측면을 서술하셨으니,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제가 이 책을 '김규항'이라는 한 사람이 가진 예수에 대한 체험 혹은 개인적 묵상서로 해석해서인지, 때로 불편한 느낌이 드는 부분들이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좋았습니다. 저는 이 책이 기술된 방식이 그 당시의 삶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 관상하는 방식과 닮아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정의된 예수님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그 실체와 존재에 다가가려는 시도로 이해했다고 할 수도 있겠구요. 그 과정은 어쩌면 지극히 자신의 세계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런지요. 제게는 우려하신 것처럼 오직 혁명가로서의 예수"만" 느껴지기보다는 제가 가진 예수님에 대한 이해에 덧붙여 그가 "강조"하려는 예수의 삶의 한 측면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책의 해석이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름 치열하게 자신의 그리고 우리의 삶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덧붙여, 이 글과 글에 달린 덧글들을 보며, '새삼' 하나의 텍스트를 대하는 무수한 이해의 방식에 대해 배우고 갑니다.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7/29 16:06
휘어진 철근을 반대 방향으로 구부리면 곧아지지 않고 더 이상하게 휘어버립니다. 저는 복음서에서 '종교'를 제거하려는 시도도 같은 부작용을 낳지 않을까 염려하는 거죠. 아무튼 일독해볼만하다는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적어도 마태오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되는 효과는 분명히 있을테니까요.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박원국 at 2009/08/02 10:14
꺄악! 정태씨!!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8/02 14:27
하앍! 원국씨!!
Commented by 개념탑재 at 2009/08/15 20:50
삼위일체론이 선택될 수밖에 없던 정치적, 동시에 신학적 이유에 대해 삼위일체론을 부정할 경우 예언자와 동격이 될 수밖에 없는 예수를 신처럼 떠받드는 일이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우상 숭배의 차원이 아니라 기독교의 일신교적 존재성이 다신교로 이전되기 때문이라는 또다른 골칫거리가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유대교나 이로부터 파생되는 기독교나 모두 일신교적 존재성이 동시대의 다른 종교와의 가장 극명한 차이점이고, 이것이 기독교의 특수성이라고 봤을 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끝까지 부여잡고 가야하는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대단한 골칫거리가 되는 셈이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인간의 형태를 했으나 인간인 것은 분명 아닌데, 그렇다면 예수는 신인가?

만약 신이라면 다른 이교도의 전통(종주신과 그의 가족들로 이루어진 다신교적 형태)과 동일한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는 골치거리가 생기게 되죠.

즉, 예수를 하나님과 독립된 형태의 신으로 인정해 버릴 경우 기독교는 더이상 일신교적 종교가 아니게 되는 것이죠. 둘 이상의 신으로 구성된 다신교가 되는 셈이고, 이는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근본적 교리와 충돌하게 되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나 동시에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기막힌 해법을 통해 기독교는 유일신의 원리를 보존함과 동시에 예수를 신으로 섬기지만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근본적 교리와의 충돌로부터도 벗어나게 된 것이죠.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9/08/19 03:09
제가 제대로 서술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at 2009/08/21 01:06
예수를 역사적으로 구성해서 '비종교적'이고 진보적 위인으로 만들려 하는 시도가 계속되는 건... 어쩌면 예수를 지극히 '종교적'으로 바라보는 보수적 일반 신도들의 막대한 인구수의 매력 덕분이 아닐까요.

진보적 함의로만 판단한다면 예수를 혁명가로 만드는 것 보다는, '논어는 진보다' 쪽이 훨씬 더 매력적일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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