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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추판다님은 칸트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C1. 경험 이전에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있다. 이 정리 각각은 옳지만 '경험'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이 철학의 그것과 같지 않다. 칸트 뿐 아니라 17세기 이후의 철학에서 '경험'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그 경험 이전의 단계로 선험성이 논의될 때, 그 '경험'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경험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C1에 대해 명확한 이해를 확보하는 것이 이 논쟁을 정리하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선험적 인식이라는 말로써, 이런 경험 또는 저런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생긴 인식이 아니라 단적으로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생긴 그런 인식을 의미할 것"이라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B판 서문에서 선험적 인식을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기하학'이 있고, 그것들 중 어떤 것이 과학적 관찰과 부합하므로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런 의미에서의 공간 개념은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공간과 같은 것이 아니게 된다. 일상적인 공간 경험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따르고, 빛의 속도에 근접한 물체의 운동은 리만 기하학을 따른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모든' 경험의 배후에 위치한 공간 개념을 표상할 수 없듯이 다른 기하학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주를 설명하기 위한 방식일 뿐,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토대로서의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떤 사물을 어떤 식으로건 경험할 때, 그것으로부터 공간 개념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사물은 '어딘가'에 있다. '어딘가'에 있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사물이란 있을 수 없다. 칸트가 의미한 '선험적 공간'은 바로 이런 개념이다. 그런데 마침 그 시절에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모든 공간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겨졌고, 칸트 자신은 수학철학적 입장에서 수학이 경험과 무관하게 성립하는 명제들의 구성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C3가 도출된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토대로서의 공간'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유클리드 기하학적 우주관을 포함하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것은 마치 '모든 글은 어떤 글자로 쓰여져 있다'는 문장에서, 글자가 글을 가능케 해주는 토대라는 말과도 마찬가지이다. 칸트 또한 당대의 한계 안에 있었고, 그래서 공간의 형식이 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것은 방어하기 어려운 주장이 되었다. 그런데 칸트의 선험적 시간과 공간에서 더 본질적인 것은 그것이 '선험적'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발견이다. 그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선이해가 요구된다. 근대 철학의 시작으로 평가되는 데카르트의 『성찰』중 제2성찰을 살펴보도록 하자. 즉,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을 명백히 거짓된 것으로 확실하게 경험한 것인 양 모두 멀리하자. 그리고 확실한 어떤 것을 만날 때까지, 아니 하다못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이라도 확실히 인식할 때까지 계속 나아가자. 아르키메데스가 지구를 그 자리에서 움직이기 위해 확고부동한 일점밖에 찾지 않았듯이, 나 역시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certum & inconcussum) 최소한의 것만이라도 발견하게 된다면 큰 일을 도모할 수 있다고 희망할 수 있지 않을까. 데카르트가 부정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경험 가능한 것들이다. 다들 익히 잘 알고 있다시피, 데카르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무언가를 의심하건 받아들이건 생각하고 있을 때 '나는 생각한다'라는 것만큼은 참으로 확인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생각한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어떤 식으로 기만당하고 있건 확실히 참이다. 문제는 데카르트가 던진 질문 그 자체였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기만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가령 러셀이 예로 들었듯이, 우리는 당연히 내일도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닭장에 사는 닭도 당연히 내일 주인이 모이를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인은 닭의 목을 잡아채 죽여버렸다. 경험에 의한 귀납추리로는 그 어떤 확실성도 보장할 수 없다. 모든 경험의 배후에 있어야 할 어떤 '일반 원칙'이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경험적 사실에 의지하지 않고 밝혀낼 수 있을까? 이것이 철학적인 질문이다. 공간이 경험되는 또 다른 방식을 경험적으로 밝혀내는 것은 심리학의 문제이지 철학의 문제가 아니다. 장작에 불을 붙이면 주전자의 물이 끓는다. 과학은 이것을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연구하지만, 근대철학의 문제의식은 그와 달랐다. 그러한 경험적 사실이 '법칙'이 되게끔하는 배후의 원리가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선험적 시간과 공간 개념을 이러한 철학적 문제의식 하에서 파악하지 않고, 대신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느끼나'라는 심리학적 질문으로 치환할 경우,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이추판다님의 글을 인용해보자. 그런데 인간의 아기들은 어떻게 그런 형식을 가지고 태어날 수 있을까? 그런 형식은 아마도 유전자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유전자의 프로그래밍은 누가 해놓은 것일까? 신이 아니라면 진화 밖에 없다. 진화도 넓게 보면 학습의 일종이므로 결국에는 개체 수준에서 선천적이지만 여전히 경험의 산물이다. 우리의 크기나 속도가 상대론적 효과를 관찰할 수 있을만큼 크거나 빠르지 않기 때문에 진화적 경험과 개인적 경험은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슷한 기하학((실제 심리학 연구를 보면 정확히 같지는 않다)을 직관적인 공간의 형식으로 산출한다. 이 문단에서 말하는 '형식'과 칸트가 말하는 '경험의 형식'은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작동하고 있다. 전자는 개별적인 육체를 가진 인간 개체가 느끼는 공간 지각의 형식을 뜻하는 반면, 후자는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이 경험으로 성립하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형식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정신질환에 걸린 사람이 유클리드 기하학과 전혀 유사하지 않은 공간 형식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도 있다. 그것에 대한 탐구는 심리학의 문제이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건 누군가가 무엇을 지각할 때 공간 표상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은 철학의 문제이며, 나는 그 발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역사는 발전이 없고, 2000년 전과 지금과 똑같은 문제만을 붙들고 있으며, 따라서 철학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심지어 칸트 본인도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철학적 사고는 나름의 역사를 지니고 그 자체의 문제의식에 대응해 왔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발전이 없었지만 아예 발전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영국경험론이 불러온 회의주의의 물결 속에서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회복한 것은 칸트가 이룩한 명백한 업적이다. 칸트가 자신의 철학 체계를 수립하면서 의존했던 지식은 낡은 것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데카르트적으로 모든 것을 회의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의 사고가 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리 많이 남지 않는다. 칸트 이후에 발전한 온갖 과학적 성취 또한 (방법적으로) 일시에 회의한다고 해보자. 그런 경우에 인간의 이성은 무엇을 알 수 있고 또 무엇을 알 수 없는가? 칸트의 공간 개념은 그러한 철학적 문제의식에 대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어떻게 공간을 지각하는가'라는 심리학적 사실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양자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이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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