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착오에 대하여

잘못된 시대에 태어났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올해로 한국 나이 스물 일곱이 된 나는, 정말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것 같다. 내가 사랑하고 동경하는 세계들이 내게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그것들이 멀어지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향해 다가가고 있지 않아서도 아니고, 또 그것들이 나로부터 부러 멀어지고 있어서도 아니다. 내가 사랑하고 동경하는 어떤 세계, 단정한 문장 속에 뜨거운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사람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 시대가 점점 흐릿하게만 보이는 것은, 그것이 통째로 부서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황혼을, 청춘의 한복판에서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저널리즘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동시에 지식인의 위기 또한, 프랑스에서는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2000년대부터 꾸준히 논의되어 왔다. 저널리스트와 지식인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전자가 사실을 직접 발굴하여 의견을 생산하는 사람들이라면, 후자는 이미 만들어진 텍스트 속에서 다시 언어를 발굴해내고 다듬는 것을 주된 업무로 삼는다. 저널리스트인 동시에 지식인일 수 있고, 지식인인 동시에 저널리스트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어쨌건 둘 다 언어를 일구어내는 사람들인 것이다.

미국인의 시민사회가 국부로 섬기는 사람은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그는 죽을 때 자신의 묘비명을 A Printer라고 새겨달라고 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신문 기사를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익혔고, 신문 기사를 쓰며 자신의 관점을 남에게 전달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저널리즘과 지식인의 성장이 서로 얽혀있는 것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관지를 편집했다. 당시의 편집자들은, 지금도 종종 그렇지만, 펑크난 기사를 자기 손으로 채워넣어야 하는 노가다꾼 역할까지 해야 했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와 함께 《상황》을 창간한다. 한편 네오콘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기 위해 《위클리 스텐다드》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아주 넓게 보자면, 특정 분야의 학문 연구자들 또한 대단히 제한된 의미의 저널리스트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들 또한 어떤 '저널'에 글을 쓰기 위해 그 모든 연구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Kant Studien》은 칸트에 대한 독일어권의 연구를 다룬다. 한편 《Nature》는 포괄적인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에 대한 최신 소식을 담아내는 저널이다. 그 '잡지'에서 다 다룰 수 없는 내용들은 개별적인 저널들에 실린다. 어느 저널에 어떤 논문을 실었는가, 그것을 읽은 이들이 다른 저널에 또 기사를 쓸 때 자신의 글을 어느 정도 참조하는가에 따라 학자의 인생이 갈린다.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저널리스트'들이 대중을 상대로 '저널'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학자들은 해당 저널에서 다루는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동료 학자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저널'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을 뒤흔들어놓는데에는 한 권의 책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을 꾸준히 모아내고, 다듬고,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하기 위해서는 정기간행물이 필요하다. 《뉴욕 타임즈》를 읽지 않는 뉴요커 지식인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Medline이 저널 이름인지 DB이름인지도 모르는 심리학도를 상상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저널을 읽는 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그 저널에 글을 쓰는 것은 그 사람이 여느 '독자'는 아님을, 하나의 완결된 순환 체계를 갖춘 이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저널리즘에는 황혼이 드리워지고 있다. 저널리즘의 왕국이라 할만한 미국에서도 이미 여러 개의 적신호가 켜진 상태다. 《Time》지의 편집장인 월터 아이작슨은 "How to Save Your Newspaper"(2009년 2월 5일)에서, 이미 미국에서조차 신문을 돈 주고 사서 보는 사람보다 온라인에서 공짜로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고, 심지어 자신마저도 뉴욕타임즈의 정기구독을 해지했다고, 가판 판매와 정기구독, 광고 수입의 세 다리로 버티고 있던 앉은뱅이 의자가 쓰러질 상황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신문 기사를 많이 읽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돈을 내고 읽지는 않는다. 신문 기사를 공짜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바그다드에 특파원을 보내거나 르완다에 프리랜서 리포터를 보내는 일이 공짜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뉴욕타임즈 또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데이빗 스웬슨과 마이클 슈미트는 "News You Can Endow"라는 기고 칼럼을 통해, 차라리 이 수익성 없는 사업을 공공 기금이 운영하는 공적 사업으로 전환해버리자는 획기적인 주장을 펼쳤다. 물론 공공 기금이 신문을 운영하게 된다면, 지금처럼 '정치적 의견'을 담은 칼럼을 실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미 블로그와 인터넷 공간에 그런 '의견'은 넘쳐나는데 뭐가 문제인가? 그들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저널리즘의 핵심은 사실을 추적하여 그것을 보도하는 데 있다. 그 기능만큼은 온전히 살려 놓아야 시민사회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최소한의 발판이 마련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전통적인 저널리즘이 죽어가고 있고, 그마나도 인터넷 광고주에게 목을 매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공익성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도발적인 주장에 대해 수많은 독자 편지가 답래했고, 그것은 "Imagining Newspapers of the Future"라는 제목의 독자 편지란으로 집결되었다. 다양한 해법을 독자들이 제시하였고, 그 중에는 '아하' 하며 무릎을 치게 하는 것도 종종 있지만, 저널리즘을 뒤덮고 있는 우울한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저널리즘은 죽어가고 있다. 동시에 지식인이라는 존재 또한 시장 논리에 의해,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시장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상황으로 인해, 입지를 잃어가고 있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지식인이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영역 밖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탄생하는 사회적 존재다. 문제는 과연 그 '전문가'가, 자신의 영역 밖으로 목소리를 낼 때, 어떻게 그가 '상식적'인 선을 지키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상식을 바꾸어낼 수 있는가이다. 여기서 저널리즘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좋은 저널리즘이 튼튼하게 버티고 있지 않다면, 전문가는 자기 영역 밖의 문제에 대해 말을 꺼낼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이 지식이 과연 확실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 마이크 데이비스의 경우를 살펴보자. 나는 방금 책꽂이에서 그의 칼럼 모음집 In Praise of Babarians(HaymarketBooks, 2007)를 꺼냈다. 그리고 가장 뒷 페이지를 펼쳐 참고문헌 목록을 들여다보았다. 제일 처음 등장하는 인용 매체는 다름 아닌 《The New Yorker》다. 두 칸 내려가면 WSJ가 나오고, 8번 각주는 LA Times가 차지하고 있다. 나는 마이크 데이비스의 스칼라십을 문제 삼고 있지 않으며, 동시에 국내 저자들 또한(특히 강준만의 경우) 국내 매체를 적극적으로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쳐낸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굳이 지적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의 거리에 대한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마르크스는 최초로 정부 발행물을 학술적 저작물에 인용하기 시작한 학자였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른바 '주류 언론'의 기사를 인용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흔히 말하는 '중심부 국가'의 전문적인 학자들이 '지식인' 행세를 할 수 있는 데에는, 이렇듯 신뢰할 수 있는 저널리즘이 그 뒤를 받쳐주고 있다는 것 또한 이유로 지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과 의견은 명료하게 분리되어 있고, 그래서 그 매체의 논조를 탐탁찮게 여긴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부터 사실만을 추려내어 자신의 입장을 구성할 수 있다. 공연히 '진실 게임' 따위에 말려들 필요 없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상식'은 그야말로 '상식'으로서 단단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상황은 그와 정 반대이다. 언론은 사실과 의견을 전혀 분리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신문을 읽고 세상에 대해 논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참여'가 아니라, 복덕방 노친네의 '꼰대질'로 전락하기 일쑤다. 심지어 신문 기자들마저도 서로의 신문에서, 혹은 자신이 속한 회사에서 만들어낸 신문의 내용이 사실을 충실하게 담고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모든 사실은 왜곡되어 있고, 그 왜곡은 모두 정치적이다. 모든 것은 정치적이고 그래서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고급 정보'를 손에 넣고자 다들 방방 뛴다.

미네르바를 둘러싼 헛소동을 돌이켜보자. 그 사건은 그 미네르바가 가지고 있던 '정보'가 고작 인터넷 서핑질로 얻을 수 있는 수준의 것이었다는 '진실'이 폭로되면서 정점으로 치달았다. 언론들은 그것을 통해 그가 '대한민국 1%'가 아니라고, 진짜 정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깎아내렸다. 물론 그의 경제학적 지식의 기본적 소양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타당하고 옳다. 하지만 정보의 출처가 고작 '인터넷 뉴스'라고 깎아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WSJ를 제외한 대부분의 서방 언론이 무료로 컨텐츠를 공개하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첩보원'들이 하는 일도 결국 그것과 유사하다. 상대방 국가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모든 일간지와 정기간행물 및 서적을 훑어보며 그것을 재가공해서 '정보'로 만드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탐닉하는 '고급 정보'는 물론 어떤 국면에서 중요하지만, 오픈되어 있는 정보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문제는 과연 그 열린 정보가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니느냐이다. 지식인이 활동할 수 있는 사회와 그럴 수 없는 사회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갈라진다.

저널리즘의 몰락은 세계적인 추세로 전개되고 있다. 학자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결국 한 사람의 학자가 되고자 하는 나로서는, 그 몰락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다. 한국어로 만들어지는 저널리즘은 그 수준에 도달해보지도 못한 상태로 허물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조선일보의 기사를 읽으면서 한나라당과 싸우고 싶지, 조선일보가 '진실 게임'으로 용산 참사의 프레임을 몰고 가는 모습을 보며 분노하고 싶지 않다. 논조야 어찌 되었건 담백한 정보가 우선 전달되는 저널리즘이,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에서는 성립한 적도 없었고, 수익 모델이 박살나고 있는 현 상황을 놓고 볼 때 앞으로도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NYT와 Times는 저널리즘의 위기에 대해 '공영화', 'iTunes식의 클릭뷰' 같은 해법을 내놓는다. 반면 한국의 신문사들은 방송법을 뜯어고쳐서 방송사를 집어삼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미국에서 재채기를 하면 한국 증시는 감기에 걸린다. 미국 저널리즘이 다리를 절면 한국의 신문사들은 개처럼 기어다니며 풀을 뜯기 시작한다. 저널리즘에 대한 불신과 그 산업의 붕괴가 한국만의 일이라면 훌쩍 털고 도망가겠다는 꿈이라도 꿀 수 있겠지만, 이것은 전 지구적인 현상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상념에 빠져들게 된다.

아도르노에 대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에세이는 그런 우울에 빠져드는 내게 잠깐의 위로가 되어주었다. 사이드에 따르면,

아도르노는 일차적으로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란 그에 따르면 "대상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것에 관심을 두는" 형식이며, "내밀한 형식적 법칙은 이단이다." 아도르노의 의미로 볼 때 에세이스트라는 존재는 당대에 유행하는 모든 것에 영원히 맞서 싸우고 화해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그는 보통 "에세이가 당대에 갖는 의미는 시대착오에 있다"고 말한다. (강조는 인용자)
140-141p. 에드워드 사이드, 장호연 옮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서울: 마티, 2008)


즉 에세이를 쓰고자 한다면 언제나 시대착오적이어야 한다. 이 말은 잠깐의 위로가 된다. 하지만 시대착오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때, 그러므로 '에세이를 써야 한다'는 해법을 내가 나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에드워드 사이드는 아름다운 문장과 차분한 해설력을 갖춘 지식인 비르투오조답게, 내가 들어보지도 못한 작가와 알지도 못하는 곡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독자를 유혹하고, 설득하고, 주먹을 꼭 쥔 채 책을 덮게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시대착오적인 에세이는, 같은 의미에서 배은망덕한 것이기도 하다. 귀를 기울이는 독자들에게 불협화음을 들려주고, 눈을 떼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러 추한 것과 끔찍한 것을 현시한다. 당혹스러워하는 독자를 향해 지식인은 피식 비웃는다. '아무튼 너는 내 글이 실린 잡지를 산 거야. 독자님, 감사합니다.' 지식인의 삶의 양태를 지탱해주는 물질적 토대가, 원고지 한 장에 얼마씩이라도 온전히 주어지던 시대에는, 그런 배덕자들 또한 얄팍한 지갑의 틈바구니에 숨어 시민권을 보존하고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나약한 20대라서 이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솔직하게, 느끼는 그대로 말해보도록 하자. 공짜가 아니면 읽지 않고, 공짜가 아니면 보지 않는 이 세상은, 바로 그 배은망덕한 자들에게 더욱 가혹하다. 나는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것 같다.





언급된 기사와 책들


Isaacson, Walter. “How to Save Your Newspaper.” Time, February 5, 2009. http://www.time.com/time/business/article/0,8599,1877191-4,00.html.

Swensen, David, and Michael Schmidt. “News You Can Endow.” The New York Times, January 28, 2009, sec. Opinion. http://www.nytimes.com/2009/01/28/opinion/28swensen.html.

“Imagining Newspapers of the Future.” The New York Times, January 31, 2009, sec. Opinion. http://www.nytimes.com/2009/01/31/opinion/l31endow.html.

Davis, Mike. In Praise of Barbarians: Essays against Empire. Haymarket Books, 2007.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 10점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장호연 옮김/마티

핑백

  • 저널리즘의 위기, 우울하게만 볼 건 아니다 - The Blographic 2009-02-10 10:13:09 #

    ... lies Need to Stay Afloat, (and possibly walk on the water)? 란 다소 긴 제목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노정태님이 쓴 시대착오에 대하여 라는 글이다. 둘 다 월터 아이잭슨의 타임지 기고문을 읽고 쓴 것 같다. 바하문트님의 글은 신문이나 잡지 등의 매체가 인터넷에 공짜로 콘텐츠를 제공하는 트 ... more

덧글

  • 2009/02/06 10:0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노정태 2009/02/06 13:26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 CJ 2009/02/06 21:07 # 삭제 답글

    저널리즘의 앞길에 있는 신호등이 적신호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신호 직전의 황신호쯤은 된 것 같습니다. 적신호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고요. 그런데 이 도로의 적신호는 저 도로의 청신호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도로에는 청신호가 켜져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널리즘이라는 것이 '언론'라는 시니피에의 근대적 시니피앙이라고 생각해본다면 'How to save your newspaper'라는 질문은 우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저널리즘이라는 시니피앙이 종말을 앞두고 있다면, 앞으로의 시니피앙은 무엇이 될 것인가를 물어야하지 않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Blogism이 Journalism을 계승할 가능성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아직 'Blogism 이라는 것은 무엇'이라고 뜻을 붙여 줄만큼 성숙의 단계에 이르지는 않았고, 지금까지는 유사 저널리즘의 형태로 발전하고 있지요. 하지만, 블로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안정적인 수익모델이 점차 개발되고 있고 블로거로 '전업'하는 수효가 증가함을 볼 때 Blogism이 발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유망해보입니다.
    Blogism이 언론의 시니피앙이 될 수 있는가는 좀 더 의견을 나눠봐야할 문제이긴 하지만 제 의견은 '그렇다'입니다. 저로서는 Blogism 이 Journalism의 반대편 도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이 도로에 켜진 신호도 아직 청신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청신호에 무척 가까운 황신호가 아닐까요.
  • 노정태 2009/02/07 03:53 #

    우선 용어의 문제부터.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하실 필요 없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현행) 저널리즘의 이면에 기의로서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인터넷 블로그의 이면에 있는 무언가와 같으며, 따라서 저널리즘과 블로그 글쓰기가 서로 대체 가능하다는 주장은 2000년대 들어와서 숱하게 논의된 그런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블로그 글쓰기가 프로페셔널한 저널리즘을 대체할 수 있느냐 하면,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존 언론에서 다루지 못했던 부분을 소수의 블로거와 인터넷 방송에서 충족시켜주는 측면은 분명히 있지요. 하지만 후자가 전자를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입니다. 제가 본론에 썼던 내용을 다시 붙여넣겠습니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신문 기사를 많이 읽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돈을 내고 읽지는 않는다. 신문 기사를 공짜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바그다드에 특파원을 보내거나 르완다에 프리랜서 리포터를 보내는 일이 공짜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이상입니다.
  • 여울바람 2009/02/07 20:02 # 삭제 답글

    '저널리즘'과 '지식인'의 관계에 대해 말한 것, 학자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지금의 시대가 쓰다는 글, 새끈하게 읽었습니다 하핫. 저도, 저널리즘에 관심있고 제 친구가(응?) 학자의 길을 걸으려고 하기에..

    글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데요,

    하나는 '저널리즘'이 담긴 '저널'을 사람들이 '원하느냐'(필요가 아닌..)하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어느때보다 신문기사를 많이 읽지만, 그 중에서도 연성기사를 가장 많이 읽지요. 예전에는 신문을 읽고 그 속에서 '시대의 상식'으로 '교양' 혹은 '간지'를 만들어냈다면, 지금은 'TV'를 보거나 인터넷 이슈 기사를 보고(읽기라는 것보단 '보다'에 가깝죠) 그 속에서 '시대의 유행'으로 '간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분명 '지식인'과 '사회적 목적'하에서는 '저널리즘'이 담긴 '저널'이 존재해야하지만, '이윤만이 유일목적이 된 시장'에서는 매우 저질의 특파원과 프리랜서를 써서 만들어낸 '연성기사'만이 남는다고 해도, 많은 이들은 아쉬움을 못 '느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BBC가 없어도 (PBS는 특수채널에 시청률과 영향력이 매우 떨어지므로..) 사람들은 즐거이 TV 시청을 하는 것처럼요.

    둘. 예전 웹 2.0 논의가 활발할 때, '오픈 소스' 및 '정보의 공유'와 '개방'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었지요. 그때 앞으로는 많은 정보, 프로그램과 소스등이 더욱더 저렴해지고, 거의 무료에 가까울 정도로 이용할 수 있는 구조가 오고, 그런 상황이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 '오픈 소스'를 비롯한 개방적 정보와 프로그램을 최대한 이용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비용도 그만큼 최대한 줄어들 수 있다는 이야기였지요. 물론, 자신의 '창작'의 비용이 줄어드는 만큼, '대가'도 줄어들어서, 어떻게 보면 '기회'일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위기'일 수도 있다고 했어요. '언론'도 그와 비슷한 모습에 이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스쳐갑니다.

    그러나 '저널리즘'이 담긴 '저널'은 일반 '상품'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 이라고 한다면,(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웹 2.0의 방식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겠지요. 그럴러면, 무엇보다 '저널리즘'이 담긴 '저널'의 가치에 대한 논의와 사회적인 인정이 필요할 텐데, 요즘 시대는 '저널'='상품'이라는 이야기만 난무합니다.ㅠ-ㅠ

    윗 님이 말한, 블로거의 저널리즘이 있다면, 그것조차 빠르게 '상품화'되어가고 있거든요. 뭐, 당연한 이야기겠지만요.
  • 노정태 2009/02/08 02:21 #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몇 가지 지점에서 논의할만한 여지가 있군요.

    첫째. 말씀하시는 수준의 '저널리즘'을 사람들이 원하지 않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사람들의 '경향성'은 쉽고 편하고 재미있고 자극적인 것을 향하지만, 그 이면에는 정확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욕구가 동시에 자리잡고 있어요. 저널리즘의 수용자를 하나의 측면으로만 뭉뚱그리면 논의를 더 진행할 수 없게 됩니다. 조선일보가 내놓는 '강호순 왜 살인 저질렀나, 사람의 탈을 쓰고...'만 보고도 행복한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그 밖의 수요자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울바람님의 논지는 그런 측면을 다소 저평가하고 있는 것 같군요.

    둘째. 정보의 생산비용이 저렴해진다기보다는, 정보의 '유통비용'이 저렴해진 겁니다. 자꾸 인용되는 '이라크 특파원'을 보죠. 정보의 유통비용이 아무리 저렴해진다 한들, 이렇게 전문적인 인력을 동원하여 정보를 '생산'할 때에 드는 비용은 결코 줄어들지 않습니다. 특파원 주재비용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또한 말씀하신 논지대로라면 현재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활자 매체들이 급격한 매출 및 이윤 저하를 겪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수익이 줄어든 만큼 비용도 줄어든 게 아니라, 수익은 확 줄어들었고 비용은 약간 절감되는 수준입니다. 이윤율은 바닥을 향해 치닫고 있고요.

    그래서 저널리즘을, '팩트'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전달이라는 의미에 한정하여 '공영화'하자는 것이 제가 인용한 뉴욕타임즈 칼럼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읽어주시면 더 좋은 논의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노정태 2009/02/08 03:13 # 답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63434&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6&NEW_GB=

    미국 내 저널리즘의 위기에 대한 최근 소식입니다. 방문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될 것 같아 올립니다.
  • 2009/02/08 15:4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노정태 2009/02/09 00:50 #

    문학의 위기에 대해서는 제가 제대로 아는 바가 없어서 뭐라고 말을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학비평계에서 나오는 목소리라고 성기게 범위를 구획지어본다면, 저널리즘의 위기는 산업적, 기술적 변화로 인한 위기에 더욱 가깝습니다. 양자는 서로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고 그것을 통한 비교에는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1:1로 대응시키기에는 무리가 있겠죠. 그것은 방문자께서 도달하신 결론과도 같을 겁니다.

    문제의 핵심이 자본이다, 이렇게만 이야기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 이웃 2009/02/09 12:18 # 삭제 답글

    결국 저널리즘도 지식인의 입지도 모두 대중 다수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일테지요. 그렇다면 왜 대중은 그 모든 것에 대해 정당한 값을 지불하지 않고 취하려고 할까요? 무료로 정보를 취할 수 있는 온라인 매체 때문일까요? 왜 대중들은 신문(또는 잡지)보다 인터넷을 뒤지고 돌아다닐까요? 지식인이 아닌 일반 대중으로서 제 개인의 생각은 지식인들에게 그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식인들은 그들의 지식을 대중에게 주었을까요? 아니면 지식인들끼리 공놀이하듯 가지고 놀았을까요? 인민을 위한다면서도 그들은 인민을 배제한 채 지식의 유희를 하는 것은 아닌지.. 언론에서도 인민은 까닭을 정확인 알 수 없었으므로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수준으로 읽히는 정보를 찾아 헤매게 되는 것이 아닐는지요. 그렇게 대중은 인터넷에 골몰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저질의 정보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졌지요. 결국 생산자도 수용자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 온 상황이 된 것이지요. 이것은 문제의 지극히 작은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 문제의 결정적 요인은 '사람들이' 아니라, 매체을 움직이는 자본과 지식인들에게 먼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이 드는군요.
  • 노정태 2009/02/09 17:04 #

    지식인이 대중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지식인의 역할은 사람들이 '시원하게' 읽을 수 있는 '후련한' 글을 써주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활발한 담론적 논의가 있어야, 대중적인 레토릭과 구호가 성립할 수 있는 거죠. 사람들은 진중권이 이명박을 잘 씹어주니까 '좋은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 이전에 그는 미학자로서 한국에서 잘 다루어지고 있지 않은 주제를 학계와 지식인들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어요. 그 두 가지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후자의 기능, 즉 지식인들의 사회를 형성해내는 본질적인 기능이 마비되어 버린다면 전자 또한 원활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후자의 기능이 마비되어가는 이유는 지식인 때문일 수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죠. 문자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기존의 체계가 붕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창비와 문지가 지식인들을 양분하던 시대를 생각해 보세요. 그때도 지식인들은 자기들끼리 '공놀이' 하고 놀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식인들의 담론에 대중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죠. '대중들이 원하는 말을 지식인이 해주지 않으니까 위기가 찾아온 거다'라는 말을 한다면, 저는 '지식인은 원래 대중의 욕망에 부응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대꾸할 겁니다.
  • 한제선 2009/02/09 12:51 # 삭제 답글

    앞의 부분은 윤동주의 시(별 헤는 밤이던가요?)가 생각나는군요. 아름답고 슬프군요. 우리 나라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 이 문화의 허약함, 절망적인 도덕성을 인정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고 비켜나갈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정태님의 말이 어려워서 그냥 넘겨 읽습니다. 물론 이 블로그를 들어오는 사람은 토론하는 것을 전제로 들어오는 것이고, 그런 글을 읽으러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좀 쉬운 말로 토론할 수 있기를 바랄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수준을 낮추라는게 아니예요. 제가 뒤를 건너 뛰었기에 그런가 이 글에서 읽은 것은 외로움이래도 화내지 마세요.
  • 노정태 2009/02/09 17:06 #

    저널리즘의 몰락에 대한 문제를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힘들군요. 뒤를 건너뛰고 읽으셨다고 해서 굳이 죄책감을 느끼시거나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 2009/02/09 22:4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노정태 2009/02/10 00:57 #

    글쎄. 내가 너랑 다른 입장인 것은,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토론의 힘을 믿느냐 마느냐에 달려있는 것일 수 있겠다. 내 한결같은 입장은 그래. 그런 불필요해보이는 논쟁이 성립할 수 있고 또 스스로 정당함을 주장할 수 있는 그런 사회야말로 '중요한' 논쟁들이 온전히 성립할 수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내 표현의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그것들이 정당할 뿐더러 적절하다고 생각해. 염려해줘서 고맙다.
  • 이웃 2009/02/09 23:18 # 삭제 답글

    원하는 말을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인들이 대중사회를 위해 담론을 벌였다면 그 담론의 목적지는 사회(대중)이겠지요. 그런데 대중들은 지식인들이 무슨 담론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대중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며 대중으로서의 주체성을 어떻게 가져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중의 한 개인으로서의 주체의식은 고사하고 권리마저 망각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위기는 지식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대중은 지식인들의 담론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지식인들은 그저 자신의 학문적 기량만을 주절대며 실재성도 실효성도 재고하지 않고 다분히 담론적 유희에 빠져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외래 학설에 어떠한 문제의식도 비판정신도 갖추지 못하고 추종만 일삼는 추태를 아주 많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또 그렇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식인들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식인들만의 담론으로는, 노정태님은 그 담론적 논의가 대중적 레토릭과 구호를 형성한다고 하셨지만, 더는 대중지향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역부족이지 않느냐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인민이 스스로 바로서지 않고는 지식인들에 의존해서만은 글쎄요.. (이것은 완전한 생각은 아닙니다.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는 있지만요)
  • 노정태 2009/02/10 01:01 #

    저는 스스로를 '대중'으로 여기는 분들께는 이런 말밖에 해드릴 수 없습니다. "어떤 지식인들은 그저 자신의 학문적 기량만을 주절대며 실재성도 실효성도 재고하지 않고 다분히 담론적 유희에 빠져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은 지식인이 누가 있느냐는 거죠.

    외래 학설에 대한 추종만을 일삼는다는 표현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비판 가능합니다. 외래 학설을 추종하지 않았던 사람들 중, 이웃님이 '지식인'으로 생각했던 사람은 그렇다면 누가 있는지요? 질문하시는 분께서 자신의 발화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 이웃 2009/02/10 09:04 # 삭제 답글

    좋은 지적이네요. 지식인들의 담론적 유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외래 학설을 애오라지 추종'만' 한다는 것은 문제 아닌가요. 그러니깐 반론까지 외래 학자들의 입에 의존하는 게 아닌지요. 작년 세계철학대회에서 한 저명한 (외래)학자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두뇌들만 모였다는 그룹에서 토의 시간을 가졌을 때 의문을 제기하는 학생들조차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라고 했다더군요. 이 예가 우리나라 지식인 전반을 아우르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철학이 부재한 정신적 빈사상태는 아닌가 염려스러운 것도 사실이죠. 어쨌든 노정태님이 타자와의 논의에 있어 나아감과 물러남까지 당당하고 부드럽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부족한 제 생각에도 일일이 답변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한가지, 노정태님이 동양철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생기네요. ^^
  • 노정태 2009/02/10 13:17 #

    동양철학이라고 해도 그것이 '외래학설'이 아니라고 볼 수야 없겠죠. 주자학은 '우리 철학'입니까? 주자학은 선불교의 유입에 맞서기 위해 유학이 의리론적 맥락을 강하게 도입하여 기존의 유교 경전을 재편성해낸 사상 운동과 그 결과물입니다. 만약 '우리의 맥락'이라는 말을 엄격하게 사용한다면, 주자학 또한 '우리 철학'은 아닙니다.

    학생들이 질문을 안 하는 것은 철학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들이 지금까지 익혀온 수업 태도의 문제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벽에다화풀이 2009/02/10 11:52 # 답글

    http://h21.hani.co.kr/section-021150000/2007/08/021150000200708200674025.html

    약간 포인트는 다르지만 이 기사랑 다소 맥락이 닿아 있는 거 같아서 링크 답니당ㅎㅎ (이미 읽어보셨을 듯? 예전에 디워 나왔을 때 기사라)
  • 노정태 2009/02/10 13:18 #

    엄... 그게, 나는 대중을 '싸워야' 할 대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아. 물론 대중들이 자체적으로 생산한다고 믿고 있는 그 '믿음'과는 싸워야 하겠지만 말야. 처음 보는 기사인데, 잘 읽었음. 땡큐.
  • 이웃 2009/02/10 14:14 # 삭제 답글

    "지식인이 진리에 순종할 의무만 있을 뿐 자신의 국가에 충성할 의무가 없으며, 비평가는 오직 제 자신의 엄정한 비평적 판단에만 의지할 뿐 국가와 대자본의 이해관계를 추종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대중 자체적으로 생산한다고 믿는 믿음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만큼의 사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솔직히 말하면 바로 위에 님이나 노정태님이나 대중에 속하지 않나요. 대중이 지식인들이 싸워야 할 그 무엇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네요. 또 붙이자면 '외래'보다는 '만'을 강조했을 뿐입니다. 그 근본을 캐자면 외래 아닌 것이 없지요. 어쨌든 제가 글의 논의를 많이 빗겨나가게 한 것 같군요.
  • 노정태 2009/02/10 18:16 #

    인용하신 글과 이웃님의 논지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인지 저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덧붙여 저는 대중과 지식인의 대결 구도를 평면적으로 전개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분명히 밝혔고요. 기사를 보여준 벽에다화풀이님 또한 '너희들은 무식한 대중, 나는 지식인'이라는 입장 하에서 저 리플을 달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글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코멘트를 달아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한단인 2009/02/12 03:14 # 답글

    어.. 뒤늦게 글을 읽고는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웃님의 댓글에 대한 노정태님의 답글에서 [그렇지 않은 지식인이 누가 있느냐는 거죠.] 를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질 않아서요.

    제가 가벼운 난독증이 있어 논지 파악을 잘 못하는 편입니다. 이웃님이 자신의 발화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라고 하신 것이 저는 잘 가늠이 안되서요. 삼류 낚시글만 써오던 터라..;;; 일러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굽신굽신..

    참.. 링크를 한지 꽤 되었는데 링크신고를 여태 안한 거 같군요. 링크 신고하고 도망갑지요~
  • 노정태 2009/02/12 04:04 #

    전문적인 학문 연구의 차원에서 보자면 다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박노자씨가 쓴 연구 논문을 보신 적 있나요? 대중적인 칼럼에서 드러나는 조근조근한 문체가 아니라, '전문적인 연구자'들의 이름으로 떡칠이 된 '어렵고 복잡하고 현학적'인 논의가 등장합니다. 진중권씨의 번역서 '청갈색책'을 보신 적 있나요? '현대미학강의'를 읽어보셔도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링크 신고는 안 하셔도 됩니다. 저 또한 제가 블로그에 쓰는 글을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하고 있는데, 그 분들이 이글루 링크를 걸때마다 '신고' 같은 어려운 절차를 밟으셔야 한다면 제가 손해죠. 고맙습니다.
  • 한단인 2009/02/12 05:13 #

    아.. 그렇군요. 이제야 이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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